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초원복집 사건 (문단 편집) == 사건 이후 == 초원복국에서 불법 선거운동 모의를 했던 사람들은 선거법 위반으로 처벌... 받기는 개뿔이고 이후 다들 한 자리씩 해먹었으며 정권 주요 보직들은 PK 중심으로 도배되며 군부정권 종식과 민주화가 이뤄졌음에도 30년 가까이 이어진 영남 독식은 계속되었다. 물론 TK에서 PK로 바뀐 데다 [[문민정부]]의 성질도 이전 군부정권과는 거리가 있었기에 TK는 상실감이 들었는지 여당 내 분쟁이 거세지긴 했으며 [[문민정부]] 출범 이후 대구에서는 [[민주자유당]] - [[신한국당]]이 한 번도 선거에서 이기지 못했다. [[http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97110600209105008&editNo=45&printCount=1&publishDate=1997-11-06&officeId=00020&pageNo=5&printNo=23701&publishType=00010|신한국 TK-PK"불화"]]. 그나마 저항의 여파로 신민주계를 중심으로 TK 일부도 살아남긴 했기 때문에 득세하던 PK까지 더해 당시 기관들 내의 주요 보직 중 영남 전체 지분은 40~50%를 웃돌기도 했다. 수도권 편중 현상이 심화되던 당시의 인구 대비로 보면 많긴 하다. * [[http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94051600289101001&editNo=5&printCount=1&publishDate=1994-05-16&officeId=00028&pageNo=1&printNo=1898&publishType=00010|군 장성 진급 PK편중 갈수록 더해]] [[http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94091600289120001&editNo=5&printCount=1&publishDate=1994-09-16&officeId=00028&pageNo=20&printNo=2013&publishType=00010|검찰요직 PK인맥 포진]] * [[http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94091500289122010&editNo=5&printCount=1&publishDate=1994-09-15&officeId=00028&pageNo=22&printNo=2012&publishType=00010|'과거'많은 지탄인물-PK 출신 득세]] * [[http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95120800209137003&editNo=45&printCount=1&publishDate=1995-12-08&officeId=00020&pageNo=37&printNo=23048&publishType=00010|PK출신 경찰수뇌 장악 경찰 고위간부 人事(인사) 해설]] * [[http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95091700289104002&editNo=5&printCount=1&publishDate=1995-09-17&officeId=00028&pageNo=4&printNo=2343&publishType=00010|"정권을 PK승리 전리품 취급"자민련 맹공]] * [[http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96070200289104009&editNo=6&printCount=1&publishDate=1996-07-02&officeId=00028&pageNo=4&printNo=2604&publishType=00010|국민회의,PK편중 인사 질타]] * [[http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96062300209104005&editNo=45&printCount=1&publishDate=1996-06-23&officeId=00020&pageNo=4&printNo=23233&publishType=00010|PK-민주계 낙하산 "人事(인사)는 家事(가사)"]] * [[http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95091600289105006&editNo=5&printCount=1&publishDate=1995-09-16&officeId=00028&pageNo=5&printNo=2342&publishType=00010|'PK전성시대'인가]] 처음부터 자기 밑에 있었던 검사들을 압박하여 참여한 부산시 지역 인물들을 [[김기춘]]이 주최한 사적 모임이라고 주장해 [[불기소처분]]하고 주동자인 [[김기춘]]만 기소되었는데, 김기춘은 이 사건에 적용된 대통령선거법 제36조 1항(선거운동원이 아닌 자의 선거운동)에 대해 위헌법률심판 제청 신청을 했고 이에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자동으로 기소가 소멸되었다. 자신이 유신 시대에 수많은 정치인들을 옥죄었던 그 선거법을 자기가 걸리게 생기자 없앤 꼴. '''전형적인 [[프레임]] 전환의 사례다.''' [[파일:external/img.newdaily.co.kr/shp_1375668407.jpg|width=180]] 김기춘은 김영삼 내각에 들어가는데는 실패했지만[* 하지만 이미 김기춘은 [[검찰총장]]과 [[법무부장관]] 자리를 거친 거물 법조인으로 [[변호사]] 활동만 해도 충분한 벌이를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.] 1994년에 나름 [[땡보직]]인 [[한국야구위원회|KBO]] 총재로 내려갔다가 [[1996년]] [[신한국당]] 공천을 받아 김영삼의 고향 [[거제시(선거구)|거제]]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그 후 3선 의원이 되었다. 사족으로 군부정권을 평생 혐오한 YS가 유신헌법을 만들고 독재 정권에 빌붙어 산 김기춘은 [[지연|같은 장목면 출신]]에 [[학연|경남고-서울대 후배]]라고 예뻐라 했다고 한다. --유신헌법 만든 줄 몰랐나-- 하여튼 이후 김기춘은 16대 국회 하반기 법사위원장이 돼서 [[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|노무현 대통령의 탄핵]]을 밀어붙이다가 실패했고 17대 국회를 끝으로 친박계 숙청에 따라서 은퇴할 것으로 보였지만... 이런 지역감정 조장 전력에도 2013년에는 [[청와대 대변인 성추문 의혹사건|윤창중 사건]]의 여파로 인하여 발생한 허태열 비서실장의 조기퇴진으로 인해서 [[박근혜]] 정부의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어 2015년 [[콩드립|2월 22일]]까지 재임했다. 하지만 비서실장 재임 시절 [[김영한(공무원)|김영한]] 민정수석의 비망록에서 드러난 것과 같이 [[문화계 블랙리스트]], [[전국교직원노동조합]] 법외노조화, [[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|세월호 참사]] 희생자 유가족에 대한 여론몰이, [[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]] 등의 각종 공작 정치, 사건을 진두지휘하고 [[박근혜-최순실 게이트]]에도 깊게 관여한 것이 드러나면서 결국 인생 말년에 구속수감되는 굴욕을 맛보게 되었다. --사필귀정?-- [[파일:external/www.ccourt.go.kr/img_judge12.jpg]] 정경식[* 공안통 출신으로 국보위에서 활동했던 검사. 김기춘보다 일을 저지른 수위는 낮지만 긍정적으로 볼 수 없는 인물이다.]은 사건 직후 초임 검사장이 주로 가는 대검찰청 공판송무부장으로 밀려났으나[* 당시 정경식의 나이는 56세로 퇴임까지 몇 년 안 남은 상황이었다.] 1993년 가을 대구고등검찰청 검사장으로 승진했고 [[1994년]]에는 무려 '''헌법재판관'''이 되었으며 임기 6년을 마치고 2000년에 무난히 법복을 벗었다. 정경식은 김기춘보다 나이가 더 많았지만 상대적으로 사법고시에 늦게 붙었기에 김기춘이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을 하는 동안에 부장검사와 검사장을 지내고 있었다.[* 김기춘은 대학교 3학년에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.] [[박일용]]은 중앙경찰학교장, 해양경찰청장, 서울지방경찰청장을 거쳐 1994년 '''[[경찰청장]]'''에 임명되는 등 승승장구했다. 저 사건이 터진 게 1992년 12월이고 박일용이 경찰청장으로 승진한 게 1994년 12월이었으니 2년 동안 경찰에서 승승장구한 셈. 이후 박일용은 경찰청장에서 퇴임하고 안기부 1차장[* 이 시절에는 안기부장이 부총리급, 차장이 장관급이었다.]으로 다시 영전했다. 이후 문민정부에서 동시기 안기부장이었던 [[권영해]] 등과 함께 각종 정치공작에 관여했다가 [[총풍 사건]]으로 구속되었다. 게다가 이 사건 담당 수사 검사였던 김진태와 정홍원은 각각 검찰총장, 국무총리(2013~2015)까지 역임하는 등 승승장구했다. 반면 이 사건을 사실상 기획한 주역인 [[정몽준]]은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강도 높은 정치보복[* 한국은행 산하의 은행감독원(현 금융감독원)을 통해 [[http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98081700329115001&editNo=40&printCount=1&publishDate=1998-08-17&officeId=00032&pageNo=15&printNo=16514&publishType=00010|현대전자 등 현대그룹 계열사의 자금 흐름을 노골적으로 조사]]했다.]에 시달려야 했고 견디다 못해 현역 국회의원임에도 정치판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겠다는 제스쳐를 취해야 했다. 그 제스쳐로 정몽준이 택한 것은 바로 정치 대신 [[축구]]에 힘쓴 것. [[김우중]]에 이어 [[대한축구협회]] 회장에 취임한 정몽준은 침체 상태였던 한국 축구계에 --돈-- 활력을 불어넣고 [[2002 FIFA 월드컵 한국·일본|2002 월드컵]] 유치까지 성공시키는 등 축구계에선 몽느님으로 등극했다. 월드컵 유치 효과로 인해 2002년엔 유력 대권주자 반열에까지 올라섰으니 문민정부 시절 몸 사리기가 나름 성공한 셈. 하지만 총리를 약속 받은 대선 하루 전 날에 [[노무현]] 후보와 갈라서는 뻘짓[* 이는 뻘짓이라는 말로 호도하기에는 어폐가 있다. 대선 하루 전 최후 유세에서 노무현 후보는 당시 적통이라 할 수 있는 [[추미애]] 후보의 존재를 언급하며 정몽준 후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것임을 대놓고 내비쳤다.]을 저질렀고 덕분에 민주당과 척을 져 17대 대선을 앞두고는 한나라당에 복당했다. 그리고 한나라당 대표로서 지휘한 2010년 제 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야당에게 참패하면서 대권주자의 꿈은 날아갔다. 게다가 2014년 지방선거의 서울시장 선거에서 [[정예선 미개 발언 논란|정몽주니어]]와 정몽즙 건으로 웃음거리가 되었고 정계를 떠났다. 이 사건으로 경질된 김영환 부산시장은 이후 [[부산교통공사|부산교통공단]] 이사장을 역임했다. 수사기관과 언론이 비밀의 내용보다 비밀의 유출 경로에 주목하였고 결국 내용이 묻혀 버렸다는 점에서 '''[[정윤회 국정개입 의혹]] 사건과 소름 끼치도록 닮았다.''' 이러한 일련의 여론 흐름 자체를 [[김기춘]]의 작품으로 보는 사람이 많으며, [[박근혜-최순실 게이트]]에서 용의자들이 태블릿 PC를 계속해서 걸고 넘어진 것도 김기춘의 기획일 거라는 세간의 추측도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